히든피겨스 (실력증명, 편견극복, 여성수학자)

 

히든피겨스

"여자가 수학을 하겠다고?" 2024년에도 가끔 듣는 이 말이 1960년대 NASA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영화 <히든피겨스>는 우주 경쟁 시대 랭글리 연구센터에서 궤도 계산을 담당했던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NASA 하면 백인 남성 엔지니어들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실제 역사 기록을 찾아보니 당시 서부 지역 컴퓨팅 유닛에는 수십 명의 흑인 여성 '컴퓨터'들이 존재했습니다. 저 역시 기술 영업직에서 "현장을 잘 모를 텐데"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기에, 이들의 실력 증명 과정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까지 800미터, 그 거리가 말해주는 것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캐서린 존슨이 빗속을 뚫고 800미터를 달려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가는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 인종분리정책은 과거의 일로 치부되기 쉽지만, 이 장면이 보여주는 건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당신은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NASA 랭글리 연구소는 서부 지역(West Area)과 동부 지역(East Area)으로 나뉘어 있었고, 서부 지역은 전원 흑인 여성 수학자들로 구성된 컴퓨팅 유닛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출처: NASA 역사기록보관소). 여기서 '컴퓨터(Computer)'란 사람이 직접 복잡한 수학 계산을 수행하는 직업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전자계산기가 등장하기 전, 인간이 계산기 역할을 했던 시대였습니다.

제가 사회초년생 시절 경험했던 상황과 놀랍도록 닮아있었습니다. 중요한 프로젝트 회의에서 제 의견은 늘 "이론은 좋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한마디로 묵살되었고, 제가 작성한 기획안은 내용을 약간 변형시켜 상급자 이름으로만 발표되었습니다. 영화 속 캐서린이 보고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했던 것처럼, 저 역시 '보이지 않는 기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을 검증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캐서린 존슨은 WHRO-TV 인터뷰에서 "NASA에서는 분리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백인 전용 화장실을 그냥 사용했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알 해리슨 국장이 망치로 화장실 표지판을 부수는 극적인 장면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화적 각색과 실제 역사 사이의 이 간극을 두고 "백인 구원자 서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Vice News는 이러한 각색이 "백인이 1960년대 남부에 있었다면 나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습니다(출처: Vice News).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백인의 도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별의 현장에서 끝내 실력으로 자리를 증명해 낸 여성들의 강인함에 있었습니다.

포트란 독학에서 팀 전체 이동까지, 도로시 본의 전략


포트란 독학에서 팀 전체 이동까지, 도로시 본의 전략

도로시 본의 이야기는 개인의 생존이 아닌 집단의 미래를 준비한 리더십의 교과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직에서 승진하면 개인의 성공에 만족하기 쉽지만, 그녀는 달랐습니다.

1958년 NACA(미국항공자문위원회)가 NASA로 전환되면서 IBM 7090 전자 컴퓨터가 도입되었습니다. 여기서 IBM 7090이란 초당 수만 건의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대형 메인프레임 컴퓨터로, 인간 컴퓨터 수십 명의 작업을 단 몇 분 만에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 계산원들의 자리가 위협받는 순간이었습니다.

도로시는 두려워하는 대신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백인 전용 구역의 도서관에 들어가 포트란(FORTRAN) 프로그래밍 언어 책을 몰래 빌렸습니다. 포트란이란 'Formula Translation'의 약자로, 과학기술 계산에 특화된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입니다. 1950년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지식을 혼자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서부 지역 동료 30명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쳤고, 결국 팀 전체가 프로그래밍 부서로 전근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도로시 본은 1949년에 이미 웨스트 컴퓨팅 감독관으로 승진해 NACA 최초의 흑인 감독관이 되었습니다(출처: 미국항공우주국).

제가 데이터 분석 툴을 독학했던 경험이 떠오릅니다. 당시 팀 내 누구도 엑셀과 SQL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퇴근 후와 주말을 반납하며 독학했고, 이를 팀원들과 공유했습니다. 주요 고객사 계약이 틀어질 위기에서 제가 정리한 데이터 분석 자료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때, 도로시가 IBM 컴퓨터실을 처음 작동시켰을 때의 그 전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감독관 비비안 미첼이 도로시를 마침내 "본 부인(Mrs. Vaughan)"이라고 존칭으로 부르는 장면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닙니다. 그건 한 여성이 실력과 전략으로 쟁취한 존엄성의 승리였습니다.

궤도 재진입 계산에서 아폴로 11호까지, 캐서린 존슨의 유산

캐서린 고블 존슨의 진짜 힘은 '분노'를 '증명'으로 바꾼 데 있었습니다. 1961년 존 글렌의 머큐리 아틀라스 6호(MA-6) 임무는 미국 최초의 유인 궤도 비행이었습니다. 여기서 궤도 재진입이란 우주선이 지구 대기권으로 다시 들어오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각도와 속도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우주선이 타버리거나 대기권을 튕겨나갈 수 있는 극도로 정밀한 계산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영화에서는 IBM 컴퓨터 계산에 불일치가 발견되자 존 글렌이 직접 "그 여자(캐서린)에게 확인시켜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글렌은 캐서린에게 계산 검증을 요청했지만, 발사 당일이 아닌 며칠 전에 절차를 완료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각색이었던 셈입니다.

중요한 건 캐서린의 계산 능력이 실제로 NASA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1960년 NASA에서 발표한 연구 보고서를 공동 저술했는데, 이는 비행 연구 부서에서 여성 중 처음으로 연구 보고서의 저자로 인정받은 사례였습니다. 그녀의 기술 노트 D-233 'Determination of Azimuth Angle at Burnout for Placing a Satellite Over a Selected Earth Position'은 지금도 NASA 기술 보고서 서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궤도 재진입 계산에서 아폴로 11호까지, 캐서린 존슨의 유산

캐서린의 커리어는 존 글렌의 비행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계산과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습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녀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고, 2016년 NASA는 랭글리 연구소의 건물을 '캐서린 존슨 계산 빌딩'으로 명명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건, 차별과 편견은 화를 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오히려 나의 가치를 대체 불가능한 실력으로 치환할 때, 그 장벽은 비로소 무너집니다. 저 역시 "여자가 현장을 뭘 알겠어"라던 차가운 시선을 데이터로 증명된 객관적 수치로 반박했을 때, 비로소 존중받는 팀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히든피겨스>는 단순한 과거의 승전보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혹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수많은 '숨겨진 인물들'에게 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고, 당신은 충분히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영화 속 세 여성이 1960년대 우주 경쟁의 중심에서 승리했듯, 우리도 우리 앞의 보이지 않는 장벽들을 하나씩 허물어 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캐서린처럼 끈기 있게, 도로시처럼 지혜롭게, 메리처럼 용감하게...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Hidden_Figures
https://www.nasa.gov/history
https://www.vice.com/en/article/hidden-figures-white-sav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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